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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뿌리깊은 우리역사” 6부, 21세기 아시아인의 역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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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6-06-30 00:00 조회18,7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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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우리역사” 6부, 21세기 아시아인의 역할(1/2)


앞에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 왔으며, 회복과 청산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을 어떻게, 실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일 것이다.
무릇 중세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성 회복운동이었다. 유럽-아시아-아메리카 대륙의 개척과정에서 발현되었던 인간의 창조성은 언젠가는 창조역사관의 관점에서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향한 패러다임이 새로운 출발선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길목에서 우리 한민족은 동북아시아 역사문화의 중심국가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동북아시아 역사문화 중심국가로 가는 길에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동북아시아 역사를 써나가는 데 있어 아시아인의 역할이 부각된다. 아시아인들에 의한 지난 1만년의 창조와 도전의 역사는 인류사에 찬란한 문명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앞으로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할 아시아인들은 과거 250년 동안 서구화 과정에서 발생했던 제국주의, 국수주의 등 모순과 분열의 이데올로기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21세기 진정한 아시아 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때묻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 해 과거 영광의 역사를 이루어낸 순수한 정신을 바탕으로 써나가야 할 것이다.

1. 동방의 창조르네상스

창조적 긴장감 속에 살아온 두 민족

하​늘의 자손을 자칭하고, 고유의 서력기원을 갖는 2개의 민족이 있다. 한민족과 유대민족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고난과 형극의 세월 속에 하늘의 메시지를 깨닫고 창조성과 생명력을 보전하면서 살아남아 그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이어나가고 있다.
우리의 역사영토는 고대에는 북방유목민족, 중국 한족과의 접경에서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중원의 세력교체기에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어왔고, 훗날 일본, 유럽, 미국 등 해양세력의 부상으로 세계열강의 삼각지대 속에서 늘 군사적 외교적 위협의 긴장 속에 살아왔다.
이스라엘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교차지로서 로마시절 약탈경제의 환란과 중세이후로 이산(디아스포라)이라는 나라없는 고난과 형극의 역사로 점철되었다가 건국 이후에도 아랍과 중동으로부터 여전히 전쟁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유대민족은 물질과 부의 역사를 주도하였고 한민족은 동방의 뿌리 역사를 만들어 왔다. 유대민족은 고난과 역경을 도전과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아 세계의 부를 검어지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한민족은 동북아, 유라시아, 아메리카의 뿌리문화를 만들고 계승하면서 동아시아 역사문화의 장자국의 위치를 지켜왔다.

지금까지 창조주의 파트너로서 제 2의 창조를 위해 인류가 도전하고 창조한 모든 것을 한민족과 유대민족은 거의 지니고 있다. 과연 한민족과 유대민족에게 축적되고 전승되어온 창조성 DNA는 무엇인가?


참고: 유대민족의 창조성 DNA

유대인의 소명의식

유대인은 “인류는 하느님이 계획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이 거룩한 계획에 동참해 앞장서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나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진다는 원죄사상은 없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죄다. 그래서 유대교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 한다.

고난과 형극의 역사이자 은혜의 길
4천여년의 유대인의 역사는 한 마디로 방랑의 역사였다. 4백여년간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보낸 40여년, 아시리아와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던 포로 시대, 로마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2천여년은 바로 유랑과 핍박의 역사였다. 이 시련의 유랑의 길은 당시의 그들에게는 힘든 고난의 길이었지만 경제사적으로는 현재의 유대인들의 부와 영향력을 만든 “은혜의 길”이기도 했다.

쿠파, 탐후이, 채다카

바빌론으로부터 귀환 이후 유대사회에는 가난한 동족을 위한 복지제도가 만들어졌다. 부유한 유대인에게 “채다카”(자선)는 의무이자 하느님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화해라고 가르쳤다. 공동체는 배움을 희망하는 가난한 유대인 학생에게 그가 원하는 과정까지 공부를 시킬 책임이 있었다. 인류 최초로 온전한 공동체 복지제도가 실현된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복지제도를 자발적으로 유지하는 민족은 유대 민족뿐이다.
유대 회당 어느 곳이나 구호기금 ‘쿠파(광주리 기금)’라 불리는 모금함이 있었다. 지급 능력이 있는 유대인이라면 공동체에 있는 쿠파에 한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기부해야 한다. 3개월 뒤에는 음식기금에, 6개월 뒤에는 의복기금에, 9개월 뒤에는 장례기금에 기부해야 한다.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탐후이(쟁반기금)’라 하여 다른 민족을 구제하였다.

토라, 미드라쉬, 탈무드
유대인은 그들만의 유일 신앙과 독특한 이상을 갖고 역사와맞섰다. 그 중심에 경전 ‘토라’(에스라에 의해 완결)가 있었다. 낯선 세계에서 생존의 한 방식으로 오래된 기억과 전통을 모아 재구성함으로써 민족의 동질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토라’는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마련해 주는 주체가 되었다. 에스라는 ‘토라’가 완성되자 그간 말로 전해오던 구전 율법을 모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천 년에 걸쳐 쓰여진 ‘탈무드’ 집필의 시작이었다. ‘토라’는 곧 성문율법의 해설서가 ‘미드라쉬’이듯 구전율법에 후대의 해설을 덧붙인 게 ‘탈무드’이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국가 설계의 대 기획자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하나의 민족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고 이들이 서로 무역을 통해 부를 쌓는 세계화의 시작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바빌론 유수로부터, 그리스, 로마, 알렉산드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 지중해 각지로 흩어져 무역을 주도하고, 중앙아시아, 중국, 인도 등 동서양 교류의 주역으로 자리잡으면서 부를 쌓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세계 경제사와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에 흩어져 있든 유대인의 환대와 보호는 국가와 경제의 번영을 의미했고 유대인의 배척과 유출은 국가와 지역경제의 쇠퇴를 낳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대국굴기의 괘적에는 유대인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시장정보를 먼저 활용하기도 했지만, 인간관계 면에서 상위귀족과의 친분과 거래를 통해서도 고급 정보를 활용하여 전쟁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와 조달에 이용하였다. 이들이 부의 흐름을 주도하였던 것은 무역에 필수적인 글을 쓸 수 있었고 시장의 니즈, 고객의 생각을 읽는 능력과 다르게 접근하는 창의성 등 경쟁우위를 갖추기 위한 필수조건마저 그들의 손에 의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초자연적 황금률
원금이 10년에 2배가 되기 위한 이자율은 7.2%(=72/10)이다. 아인슈타인은 72법칙은 수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추정값으로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실용적으로 사용하는데는 매우 유용하다고 했다. 공기 중 질소와 산소의 농도 비율은 72:28이다. 사람의 몸 속 물과 살의 비율은 78:22이다. 정사각형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원의 면적은 정사각형의 72%를 차지한다. 이처럼 72의 숫자 속에는 물질, 집단, 자연, 시장, 시스템, 삶의 철학 등 모든 자연과 사회의 원리와 질서가 숨어있다.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을 때 통찰이 필요하다. 미래를 읽는 직관으로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렇듯 유대인은 초자연적인 황금률을 만들어내고 또 매우 잘 활용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방짜유기가 되려면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72:28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의 창의성과 힘의 원천
유대인의 눈에 초자연적인 황금률이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창조자의 눈으로 보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교육과 기도에 있다. 교육은 질문과 답을 교환하는 토론으로 이루어지고, 기도는 하느님에게 묻고 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의력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남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유대인의 창의성은 독서문화, 질문과 토론문화, 융합과 통섭문화, 수평문화를 통해 키워졌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평등사상이 수평문화와 유대인의 창조정신인 ‘후츠파 정신’을
낳았다. 유대인이 오늘날 발휘하고 있는 힘의 원천은 고난의 역사, 공동체의식, 학문 숭상에 있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빛을 낸 이유는 낯선 땅에서 늘 억압 받아 생존을 위해 창의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 한다. 생존의 가위 눌림이 유대인 창의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악조건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서 유대인 민족과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난의 크기와 깊이는 민족의 집단 무의식과 아이큐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고, 단결력과 공동체 자본주의, 공동체가 책임지는 교육과 복지제도를 만들게 한 것이다. 유대인에게 학자 곧 랍비는 가문의 영광이다. 고대로부터 자기 언어를 갖고 있었고 의무교육과 평생교육을 하는 높은 교육열을 물려주었으며, 돈을 벌고 불리는 것을 어릴 적부터 교육을 늘 받는다.

창조경제와 창업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 나라를 세워 방랑의 시대를 접었다. 당시 이스라엘 건국은 오늘날 창조경제를 이끄는 창업국가를 만드는 시발점이었다. 건국 30년 전에 이미 대학을 세웠고 4차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군수산업, 자원도 열악하고 척박한 땅에서 담수화, 원자력, 바이오 등 벤처사업 순환생태계를 뿌리내려, 중동의 화약고 속에서도 텔아비브는 제 2의 실리콘 벨리와 같은 창업국가로 변모시켰다. 지난 60년 이스라엘 건국의 성과는 도전과 상상력, 융합과 통섭 등 창조경제의 원형을 창출하여 창조경제 패러다임을 주도하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창조주는 우주, 지구, 생명, 인간을 창조하였다. 인간은 창조되고 진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 결과 창조성에 관하여 3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창조, 진화, 변화는 같은 질서를 다른 시간의 개념으로 바라본 것이다.
둘째, 자신의 DNA를 처음으로 알아낸 최초의 생명체이고, 셋째, 인간은 창조주의 완성을 향한 제 2 창조의 파트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 낮과 밤을, 둘째 날에 궁창과 하늘을, 셋째 날에 풀과 과일나무를, 넷째 날에 태양, 달, 별을, 다섯째 날에 물속의 생물과 하늘의 새를, 여섯째 날에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릴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모든 것이 참 좋았다.”(성경 창세기에서 발췌)
“창세기에서 창조의 대목을 읽을 때, 하느님을 전능한 마법 지팡이를 든 마법사인 양 상상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존재들을 창조하시고서 각각에 부여한 내적 법칙에 따라 그것들이 발전하도 록 놓아두셨습니다.
세상의 기원이라고 오늘날 제시되는 대폭발 우주론은 신적 창조자의 관여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진화는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데 그것은 진화가 나타나려면 진화하는 존재들의 창조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시작과 생명의 진화론을 믿지만 이 또한 하나님 계획의 일부”라고 천명했다. 교황은 “오늘날 세상의 기원이라고 과학자들이 믿는 ‘빅뱅’은 신성한 창조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황은 진화론에 대해서도 “수 천만년 동안 생명체가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 조차 창조론과 대비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창조물 자체가 진화한다는 것 역시 예상됐던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교황은 “크리스찬들은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면서 “세상의 진화 역시 모두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며 선을 그었다.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는 어느새 퇴색된 진부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창조는 어느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다. 창조는 창조주의 애정이 담긴 무한 연속 과정이고 그 안에 더 완벽한 세상을 향한 진화가 있는 것이다. 창조주는 지구의 역사 가운데 99%의 시간을 공간과 에너지를 만드는 데 쓰셨고 1%의 시간을 고등생명체와 인간을 창조하고 진화하는 데 쓰셨다. 이것이 창조주가 인간에 대해 베푸는 사랑의 시간표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잊혀진 창조성 회복
14 ~ 16세기 중세에 인간성 회복운동이 있어났다. 중세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개화하였던 인간과 예술의 문명이 부활하는 인류역사의 대사건이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주인과 노예 체계로 살아왔던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을 계기로 늘어나는 인류의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들이 해결되어 왔다. 중세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은 인류의 정신적,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은 지구촌 어디에선가 짓밟히고 있고 그 파괴 행위자와 배후 조종자는 창조 파트너로서의 창조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21세기 이후는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모두 찾는 르네상스를 전개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상과 도전이 마음껏 이루어지는 메타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1만여년에 걸쳐 안류문명이 창조와 진화 발전을 이끈 제 2 자에 의한 역사창조는 인간의 창조성 회복 즉 창조르네상스를 일으키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인류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능력을 보여주었고, 또한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이 고민해온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과 문화유산, 사회시스템 등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본 바탕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도약의 기반이 될 것이다.


참고: 역대 교황의 교황청 과학원 연설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1] “빅뱅과 같은 복잡한 과학 이론 뒤에도 신의 뜻이 있다. … 기독교인들은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6] “지동설처럼 진화론이 언젠가 정설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 1951] “과거에 성급하게 선언했던 것과는 반대로, 진실한 과학이 더욱 진보할수록 과학은 하느님을 더욱 많이 발견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과학이 여는 모든 문의 뒤편에 서서 지켜보며 기다리고 계시는 듯합니다. …

참고: 성자의 기술
[성 어거스틴] 가톨릭교회는 그 동안 성경에서 창조를 말하는 대목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데 동의를 이루지 않아 왔다. 예를들어,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창조의 엿새를 순수하게 비유적인 의미로서 해석했으며, 근현대의 일부 가톨릭 저자들도 창조가 행해진 “날들(days)”을 지질학적 시기로 받아들였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비난을 받지도 않았다.

[교황 레오 13세] 교황 레오 13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세기를 쓴) 영적인 기자는 하느님이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이 익숙한 표현으로 의미를 전해주신 바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창세기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들에서는 성 어거스틴이 가르치셨듯이 두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 첫째는 성서의 진실은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는 신적인 성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설될 수도 있으므로, 순수 이성이 성서에 잘못 담긴 것으로 여겨지는 진술을 증명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어떤 하나의 견해에 엄격하게 고착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참고: 교황청 과학원
[교황청 과학원] 교황청의 과학원은 세계 각지의 저명한 과학자 80명이 참여하고 있다. 1970년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Werner Arber)가 과학원의 현 대표를 맡고 있고, 멤버 중에는 널리 알려진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일본 역분화줄기세포 연구자인 야마나카 신야도 있다. 교황청 과학원은 17세기 갈릴레오가 활약했던 린체이아카데미의 전통을 이어받아 19세기(1847)에 재건됐으며 다시 20세기(1936)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편됐다. 그 사이에 과학원을 거쳐간 노벨상 수상자만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70여 명에 달한다.
교황청 지원을 받되 독립 연구기관으로 존립한다. 교황 비오 12세는 일찍이 1940년에 과학원의 연구 자유를 강조하면서 “인류 기술과 학문의 숭고한 옹호자인 여러분께 가톨릭교회는 방법과 연구에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합니다.”라고 밝혔다.
“교황청 과학원은 수학, 물리, 자연과학의 진보, 그리고 관련한 인식론적 물음과 쟁점에 관한 연구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학원이 행하는 숙고와 연구는 어떤 한 나라, 정치, 종교의 관점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써, 과학원은 교황청과 그 여러 기구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의 값진 원천을 만든다”라고 말하고 있다.
과학원이 제시하는 주요 관심과 활동 분야는 기초과학, 지구적 물음과 쟁점을 다루는 과학과 기술, 제3세계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 과학 윤리와 정책, 생명윤리, 인식론 등 여섯 가지다.


멀어져 가는 인간 본성으로의 복귀
성경에 의하면 창조자가 탄생시킨 지구의 대륙, 생명의 창조와 진화에 걸린 시간은 6일이다. 인간이 측정한 시간으로는 45억년이다. 인간의 창조 그 이전까지의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생물, 무생물은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자의 선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이러한 선물을 베풀기 위해 창조자의 시간 5일과 인간의 시간 44억년이라는 창조적 작업 과정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제 2 자의 창조 행위는 우주의 창조자가 만든 뜻과 일치하는가? 그러기 위해 인류는 공정한 역사를 창조하였는가? 인간이 바라는 역사는 만들어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증거 2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민족의 “홍익인간”(세상을 더 넓히고 널리 이롭게 하라)과 유대인의 “티쿤알람”(To improve the world) 이다. 지구의 긴 역사를 극히 단순한 관찰에 의해 축약하건대 제 2자에 의한 역사 창조에는 2가지 위대한 사건이 존재한다. 하나는 유대인의 부와 물질문명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한민족에 의한 정신문화의 역사이다. 두 민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을 자처하였다. 자신들의 종족은 자연의 기운으로부터 뻗어 나와 하늘의 소임을 완성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티쿤알람”, 한민족은 “홍익인간”의 높은 이상을 하느님의 메시지로 읽었고 받아들였다. 천손의 혈맹임을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하기 위
한 것이었다. 유대인은 고난과 형극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선물 받은 지구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였고, 한민족은 풍류로부터 바람처럼 살면서 정신적 뿌리를 지켜가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남긴 부의 역사는 슈퍼자본주의의 딜레마에 빠져 있고, 한민족의 정신문화의 뿌리는 100년 그 이전에 잠복하였다가 남북의 이질성으로 갈라져 있고 아직 싹이 트지 않은 채 잠자고 있다.
이 모순과 잠복의 현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게 되었는가? 인간의 존엄성의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소유욕과 탐욕, 그리고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간의 뇌가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만들어낸 생각과 행동들의 퇴적물 속에서 싹튼 독버섯과 같은 것. 이것은 본디 천손의 자손을 자임할 때의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天命之謂性)과는 별과 별 사이만큼 멀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령,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창조성 회복을 위한 거대 담론이 시작되어야 한다.


창조르네상스를 시작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
모든 것은 마음과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창조 르네상스의 시작을 위한 새로운 관점이 세워져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회복하는 창조르네상스를 열어가기 위해서 이제부터 작은 차이를 만들어 보자. 그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조문명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개화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창조르네상스 시대에 걸맞은 창조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지배적인 생각의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 지금은 창조개벽의 시기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창조르네상스 나아감에 있어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생각 속에 새로운 “역사관”, “인간관”, “희망관”이 자리잡아야 한다. 미래 창조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시대정
신을 이끄는 패러다임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즉 “역사 속의 길 찾기”, “마음의 창조성 회복하기”, “새 창조의 씨앗뿌리기”의 작은 시작을 만들어가야 한다.

역사관 – History
창조시대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역사에 길”을 묻고자 한다. 이제 인간의 창조성 기운을 회복하고 창조르네상스를 열어 나가야 할 시대이다. 역사 속 인간의 창조성을 이어온 연결고리를 찾아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로 이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창조적 관점의 역사관이다.
지구의 창조와 진화의 역사, 한민족과 유대인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인간관 - Human
창조르네상스의 출발선은 “마음과 생각”에 있다. 인간의 거의 모든 시대를 지배해온 “노예”에서 “주인”으로 우리 생각의 주름살을 펴고, “바람”에서 “빛”을 뿜어내는 미래 문명의 그레이트 이니셔티브를 시도해야 하고,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는“소유본능”에서 벗어나 평화와 상생의 “창조본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의 동시 회복이 이루어지는 창조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관 - Hope
새 창조의 거대 물줄기를 열어갈 “희망”을 제시하여야 한다. 새 시대를 만들어가는 인재, 사회, 미래에 주어진 위대한 과제들이 우선 공유되어야 한다. 창조르네상스를 위한 생각과 행동, 그리고 “도덕성을 갖춘 리더로서 창조형 인재”, “메타시스템의 조건에 부합하는 창조형 사회”,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창조형 미래” 등 실제 사람과 시스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그랜드 디자인이 필요할 것이다.

창조사관에 바탕을 둔 인류역사 공동연구

21세기 이후는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사는 세계화의 시대이다. 고대 12환국이 분할된 이후 인류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터전에서 살다가 이제 과학기술의 덕분으로 만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다시 하나로 만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계인류를 지구촌의 한 가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필요하다.
그 간 인류문화의 역사는 사실과 달리 많은 훼손과 왜곡의 파란을 겪어왔다. 부족한 사료와 유물, 민족우월주의, 국수주의, 식민주의 등 불순한 의도에 의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았고 국민교육에 이용하였다. 동양에서 중국은 고대역사 일부, 원, 명, 청나라 이후, 일본은 일본사기,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에서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더욱 극심하게 역사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실과 사관을 뒤틀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역사를 정치적 목적이나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은 하늘의 뜻 즉 창조자의 진실에 역행하는 것이다. 역사의 역할은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뺏고 빼앗기는 역사가 아니라 서로가 공존과 상생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른바 창조사관이다.
역사적 서술이 아직 미흡한 고대 환국의 역사는 이름을 달리 붙여도 좋겠지만 서양인의 역사도 아시아인의 역사도 아닌 인류 공동의 역사라고 해놓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유라시아문화공동체의 잊혀진 역사는 전 세계 모든 인류와 연관이 되어 있어 앞으로 역사연구는 민족주의적, 영토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주의적, 창조주의적인 시각에서 정치적 목적을 배제하고 접근하여 미래문명전략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찾는 것을 대전제로 기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창조 패러다임에 바탕을 두고 온 인류가 만들어나갈 창조적 미래를 건설해 나가기에 앞서 과거의 인류공동의 역사 즉, 창조역사관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창조역사관이 현재의 역사관과 대척점에 있지는 않다. 역사의 왜곡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정치적 목적과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 서로 엉켜있기 때문이고,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역사 기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는 모든 학문 영역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밝히고 만들어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과 학문발달의 미흡, 국가간 학제적 연구의 결여, 경제적인 문제 등이 얽혀있기 때문인 것이다. 창조역사관에 의한 인류공동의 역사 기술을 위해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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