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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뿌리깊은 우리역사” 2부. 동방의 빛 고조선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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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5-11-01 00:00 조회20,0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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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포/럼


“뿌리깊은 우리역사” 2부. 동방의 빛 고조선의 활약

 

발해연안에서 동양문명의 꽃을 피운 고조선은 동양경제사를 일으켰다. 고조선의 7대 수출 품목은 소금, 말, 화살, 모피, 비단, 모직물, 구리로 추정된다고 홍익희 교수는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 모두에서 중국을 압도하였다.

고조선은 불(토기, 제련, 유리), 물(배, 무역), 활(복합궁, 흑요석 화살촉), 철(청동기, 강철), 말(기마), 글(갑골,가림토), 얼(홍익인간 재세이화), 꼴(모직, 면직, 비단, 갑옷), 밝(동이족, 맥족, 예족) … 이런 면에서 유라시아, 중원대륙, 만주와 교류하여 개방적인 열린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면서 동북아 시원문명의 발화점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의 진개가 동호를 침공한 후 대릉하와 요하를 넘어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조선과 중국과의 최초의 조연전쟁이 일어났다. 농업 기반으로 발전한 한족이 서서히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결국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글은 홍익희의 “한반도이야기”, 심백강의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 등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1. 동양 경제사의 주역

고조선의 원래 국호는 조선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통일을 이룬 나라, “해가 뜨는 아침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관자』, 기원전 4세기 『산해경』과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사기』 <조선전>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 때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환웅으로 상징되는 청동기문화 집단과 웅녀로 대표되는 신석기문화 집단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기록된다.

고조선은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하던 즈음인 BC2333년에 건국하여 210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후 현재까지의 세월(2015년)보다 더 많은 시간에 걸쳐 동양 경제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 고조선을 앞서 는 국가나 통치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조선 국가가 성립하는 근거로, 고인돌(5~6000년전), 성벽(5000년전), 별자리 관찰(4800년전), 비파형 동검(4500년전), 잔무늬거울(2500년전), 빗살무늬와 민무늬 토기(5000년전) 등이 있다. 농사를 지으려면 절기를 안다는 것이고 절기를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안다는 것이다. 천문 기록이 있다는 것은 조직적인 체계하에서 하늘을 비롯한 자연현상을 정기적으로 관찰했다는 뜻이다.

청동기(BC2000~BC300)를 사용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군장(족장)이 출현하였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대국가는 약탈경제-생산경제-거래경제의 순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고조선에서는 약탈경제의 흔적이 없다.

 

고조선의 영역은 서쪽으로 난하유역, 동으로 연해주, 남으로 한반도, 북으로는 흑룡강까지 이르렀다. 약탈과 정복 없이 어떻게 그러한 강국이 되었을까?

신용하 교수는 고조선은 기원전 30~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라고 말한다. 중국의 전설상 최초국가인 하나라BC2070~BC1060)보다 수백년 앞선나라였다. 발해만,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고조선 시기에 중국 중원에서는 요, 순, 하, 상(은), 주, 춘추전국, 진 제국, 한나라, 초 등 여러 나라가 명멸했다.

고조선이 이렇게 강력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질 좋은 활과 불을 다루는 기술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과 목축

4천년 전 한반도 사람들은 쌀농사 이외에도 오곡을 재배하고 1년에 2번 농사를 지었다. 농업생산성이 중국보다 월등히 높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세율이 수확의 10분의 1이었다. 『맹자』 <고자장구>에 백규라는 인물이 맹자에게 “나는 세금을 20분의 1만 받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그것은 맥의 방법이오”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원전 1300년경의 청동기 유물과 함께 발견된 콩의 원산지는 만주 남부와 한반도로 본다. 고조선의 콩은 이 후 제나라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다. 『사기』에 보면 “제는 북으로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융숙이라는 것이 바로콩(대두)이다. 기원전 623년의 일이다. 

고조선은 그 성격상 정착형 기마민족이다. 조선족, 선비족, 흉노족이 다 알타이어족으로 같은 뿌리의 유목민족 후예들이다. 그들 주업의 하나가 말을 타고 하는 몰이 사냥이었다. 『한서』에 기원전 109년 무제에 패한 고조선의 태자가 말 5천필과 군량을 바쳤다고 한다. 이 때 바친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만한 분량의 말을 바칠 만큼 많은 말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사냥도 하는 농경민이 주를 이룬 농경문화가 기본적인 문화였지만 말떼와 염소들을 기르며 초원 생활을 하였다.

 

무역강국

고조선의 7대 수출 품목은 소금, 말, 화살, 모피, 비단,모직물, 구리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인삼, 잣, 옥이 고조선의 특산물이었다. 수출품목 가운데 박달나무 활과 흑요석 화살촉은 일종의 독점 상품이었다. 백두산 근처에서만 공급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청동검 등이 귀한 수출품이었다. 모피의류와 비휴(맹수 이름)가죽, 표범가죽, 말가죽, 곰가죽 등이 당시로서는 고부가가치 사치품들이었다.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구리가 동이족에 의해 생산 사용되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구리가 철로 대체되었다. 기원전 17세기 히타이트 제국 초기에 철은 금보다 5배, 은보다는 40배나 값진 물건이었다. 12세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은 가격의 8배였다. 고조선과 고구려가 철광산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다. 또 중국이 계속적으로 안시성을 줄기차게 공격한 것도 근처의 무순광산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철은 선비, 거란 등 인근 부족들을 거느리는 당근이었다. 당시 중국은 철이 오랑캐들의 군사무기로 쓰이지 못하도록 수출을 금할 때였다.

고조선은 주변국들을 연결한 중계무역으로도 큰 이익을 취하였다. 중원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면서 주변 유목민족들 하고도 거래하였다. 이 중국과 주변 유목민족 두 그룹을 연결해 줄 수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었다. 유목민에게서 말과 유제품을 받고 소금, 화살, 구리와 철광석 등 전략물자를 공급해줌으로써 제후국으로 통제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중계무역으로 비단과 말을 바꾸는 무역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 고조선의 국력

고조선은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 모두에서 중국을 압도하였다.

세계 최강의 무기 맥궁(각궁)은 최대 사거리가 360~ 380m 로 중국의 100m 에 비해 월등히 앞섰다. 중국사서에 “고구려 산상왕 때인 222년 오나라 손권이 황제로 즉위할 때 고구려가 각궁을 선물했다고 하며 같은 시기에 한나라 헌제에게도 선물했다”고 한다. 화살촉은 초기에는 흑요석이었으며 철기문화 이후 강철제를 썼다. 당시 적군의 갑옷을 뚫는 세계 최강의 무기였다. 중국은 청나라 때 우리나라 각궁을 가져다가 베껴서 만들어보려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 뒤 우리나라를 견제하느라 한 때 중국 남방에서 나오는 물소뿔의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 전국시대 이후에도 중국에서 활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쇠뇌에 밀려서다. 진시황 묘에서는 활 무기는 모두 쇠뇌만 발굴되었다. 고조선에서도 기계식 활인 쇠뇌가 등장했다. 그 무렵 중국은 고조선의 쇠뇌와 같이 사거리가 긴 쇠뇌를 보유하지 못했다. 당태종이 신라의 쇠뇌 명장 구진천을 직접 불러서 쇠뇌를 제작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조립식 무기의 대량생산 교역을 통해 구리와 주석의 확보가 많아지자 청동무기의 수가 늘어났다. 무기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들이 축적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 농경과 수렵을 하는 것보다 세력을 더욱 빨리 늘리는 방법이 되었다. 발달된 청동무기를 쓰는 민족이 쉽게 주변을 제패할 수 있었다. 청동무기와 갑옷의 사용은 중앙집권형 나라를 탄생시켰다.

가장 오래된 청동검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긴 창은 고조선 중기부터 사용한 전차(수레)와 함께 전쟁사에 대단히 유용한 무기였다. 당시 전투의 주력 무기는 검이 아니라 활과 창이었다. 고조선은 활이 주력이었고 중국은 창이 주력이었다. 비파형동검은 검신 자체가 더 강할뿐 아니라 조립식이라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비파형 창끝인 동모의 연대는 기원전 26세기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청동꺽창은 청동검과 청동도끼를 대신하여 말을 탄 기병들의 갑옷에 타격을 주는 찌르는 도끼였다.

고조선은 요녕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소규모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비파형동검 문화권은 요하, 송화강, 한반도에 걸치는 한국청동기문화권과 거의 일치한다.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는 동이족의 분포는 고대의 한민족이라 할 수 있는 예, 맥, 부여, 고구려, 북옥저, 숙신, 읍루 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비파형동검의 상한연대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기원전 12 ~ 13세기까지 올려보고 있다.


고대의 신비, 다뉴세문경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은 동이족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로 세계 고고학계에 인식되어 있다. 디뉴세문경이란 초기철기시대에 나타난 청동으로 된 거울로 잔무늬거울이라고 한다. 20cm가 안되는 원내에 깊이 0.7mm 폭 0.22mm로 구성된 13,300개의 원과 직선이 새겨져 있는데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과 같다.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도 여전히 불가능한 이런 청동거을을 기원전 4세기경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다.

 

수레와 바퀴

고대 경제사에서 불 다음에 이어진 유용한 발명이 바퀴다. 바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천년경으로 도공들이 사용하는 물레에 사용되었다. 바퀴가 수레에 사용된 것은 기원전 3.5천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였다.

기원전 2.6천년경 말 4마리가 끄는 사륜전차의 자개상감 그림이 수메르 우르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기원전 2천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히타이트 등지에서 바퀴살이 달린 바퀴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인류는 수레를 이용하여 대규모 관개시설과 성을 축조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여 고대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기원전 27세기경에 동이족의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수레가 동이족 영역에서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벌판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단일 문화권으로 엮을 수 있었던 것도 수레를 굴려 기동력이 뛰어났던 덕분이다. 당시 고조선은 이미 화물 운반용 짐수레도 발달하여 주변국과 교역 및 철광석 운반에 요긴하게 사용했다. 고조선이 북쪽 멀리 있는 실위로 철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도 수레 덕분이었다. 수레는 수메르와 고조선 양쪽에서 비슷한 시기 거의 동시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해협 장도 역사박물관에 있는 고조선 전차는 서주 시대의 것으로 진시황이 자랑하던 전

차보다도 수 백년이나 앞섰다.

 

교환경제와 원시화폐

교환경제 기준을 위한 도량형 곧 쌀되와 저울 등이 이미 기원전 23세기경 만들어졌다. 이는 중국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보다 1900년전의 일이다. 고조선은 농업과 목축업뿐 아니라 수공업도 일찍부터 발달하여 상업의 발전을 가져와 당시 벌써 시장이 있었다. 조시는 육지 교통의 중심지에, 해시는 진과 포로 어촌과 항구에, 신시는 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적인 교역시장이었다.

우리나라 화폐사에 “기원전 2133년 구멍을 뚫은 원공패전을 돈으로 사용케 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夏代말에서 商代초에 유통된 패전보다 고조선의 원공패전은 몇 세기 앞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교환수단으로자모전, 공방전 등 주조 화폐가 개발됐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고조선이 시장경제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고조선에서는 칼 모양의 도전이 화폐 구실을 하였다. 특히 명도전이 유명하다.

이렇듯 고조선은 경제사에서 이야기하는 3대 도약 곧 인류의 3대 발명인 불, 바퀴, 원시화폐가 모두 이루어져 있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인간”이란, 첫째 “사람이 사는 땅을 크게 더한다”는 의미로서(윤덕원) 싸우지 않으려면 새로운 마을, 나라가 들어설 만큼 땅이 넓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사람의 사이를 크게 더한다”는 의미로서 씨족, 부족, 종족, 민족 등 수적으로 많게 한다. 나, 너, 우리 등 질적으로 두텁게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웅족과 호족이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라”라는 당부로도 해석할 수 있다(박상림).

셋째 천지 곧 하늘과 땅이 원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지칭하는 '홍익하는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때 홍익이란 하늘과 땅의 웅대한 뜻과 이상을 역사 속에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이란 천지광명의 이상 세계를 건설하는 데 앞장 서는 사람을 말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요,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니, 세상에 났으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이치” 라는 큰 깨달음 속에서 나온 사상이 홍익인간이다(홍익희).

 

홍익인간의 통치이념은 국민들 사이에 신뢰와 질서를심어주어 주변 나라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이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통치이념이었다. 고조선이 주변을 아우르며 2000년 이상의 강대국을 이룰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 뒤 부여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지배하는 근본사상이다. 우리나라 교육법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다.(홍익희)

 

재세이화(在世理化)

삼국유사에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함께 재세이화(在世理化)의 통치이념이 등장한다. 단군사상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天孫意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천손의식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핵심 이념으로 한다. 재세이화는 하늘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화(理化)를 땅 위에서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재세이화'란 '세상을 하늘의 이치로 교화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는 하늘의 섭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재세이화는 하늘의 섭리에 부합되는 세상을 말한다. 곧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앞장 서는 사람이 홍익인간이다. 이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한민족에게 가르쳐 준 준엄한 삶의 자세이다.(홍익희)

 

팔조금법, 낮은 세율

국가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법이 있었다. 남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자는 그만큼의 복수로 제한했다. 개인간 복수나 사적인 응징과 보복을 금지시키고 국가의 공권력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케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보인다.

그것은 국가 즉 공권력이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유지하는 세율은 1/20에 불과했다. 심지어 1/80로 줄어들기 조차한다. 당시 주나라는 농민들로부터 수확의 10분의 8까지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고조선에는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규휼법이 시행되었다. 기원전 6세기의 공자도 ‘현인들이 살고 있는 바다 건너 동

이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부러워한 큰 문명을 고조선이 이룩한 것이다.

 

동호, 예맥, 숙신

고조선을 이루었던 중요한 3개 부족이 동호, 예맥, 숙신이다. 『요사』에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곧 단군왕건식 제정일치의 전통이 가장 오래 보존된 지역이 바로 동호지역이었다. 『진서』에 동호 계열의 선비족인 모용황이 조선왕에 봉해졌으며 북연의 모용운도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의 기원도 동호지역이라고 한다. 동호 지역의 중산국에서 철기문화가 시작되었다 한다. 『위서』에 오환(동호)는 요동 만주지역에 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 하였다.

동호는 후일 해, 실위, 거한, 몽골 등으로 불리면서 북위, 요, 원 등을 건국하게 된다. 숙신은 후일 물길, 말갈,여진으로 불리면서 금, 청을 건국하였다. 동호는 흉노의 침입으로 선비와 오환으로 갈라지고, 선비는 척발(북위),모용(전연), 우문(거란) 단 등으로 분리되었다.

동이족이 세운 상(은)나라 중국설화에 나오는 복희, 신농, 황제, 소호, 전욱, 제곡, 요, 순 등 소위 삼황오제 가운데 복희, 신농, 소호, 순

은 동이족 사람이라 한다. 또 하나라에서 은, 주, 진, 한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상(은)나라는 동이족이 중심이 되었던 나라이고 나머지는 화하족이 중심이 되어 이룬 나라들이다. 『사기』에서도 상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이고 주나라는 한족 국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술잔을 가리키는 용어는 배(杯)다, 그런데 상나라 유물에는 술잔을 잔(醆)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상나라 유물에서 숟가락이 발견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일찍이 홍산문화를 창조했던 발해만 연안 북부의 동이 일파가 서남쪽으로 남하하여 기원 17세기에 하나라를 정복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그 뒤 기원전 11세기 즈음 주나라에 의해 망한 뒤 일부 상나라 유민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5천여 유민의 인솔자가 “기자”였다. 그 유민들은 연산산맥을 넘어 고향인 발해연안 북부지역으로 돌아온다.


고조선의 골각문자, 녹도문자, 가림토문자

1899년 중국 고대 상(은)나라의 수도인 은허에서 갑골문자를 발견하였다. 발굴된 거북 뼈의 연대는 대부분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으로 상나라 말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2004년 갑골문자보다 무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새로운 문자가 동이족이 살던 산동반도에서 발견됐다. 소 어깨뼈에 새겨진 골각문자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갑골문자는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기원전 39 ~ 38세기경 창제된 녹도문(사슴 발자국 문자)은 기원전 3500년경의 수메르 상형문자나 이집트 상형문자 보다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다. 공자의 7대손 공빈이 쓴 『동이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동이에는 자부선인이라 하는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이 그 문하에서 내황문을 배워와 염제신농의 뒤를 이러 중화의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고조선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녹도문자의

존재가 공빈의 동이열전에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고조선 가륵 임금 때인 기원전 2181년에 민초들을 위하여 38자의 가림토 문화를 만들어 발표하였다. 한글의 원형이다. 가림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훈민정음이 고전을 모방하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과 한글창제를 반대하던 최만리의 상소문에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자가 아니라하는 구절을 들어 훈민정음은 가림토를 본 따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기

인류문명 발달사에 의하면 구석기, 신석기, 철기시대를 지나 오늘날은 실리콘시대라 일컫는다. 청동기 시대에 철기를 발명하는 것은 오늘날 먼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과 같다. 고조선은 당시 중국에 앞서 철기시대를 열어감으로써 동북아에서 강자의 위용을 떨쳤다. 만리장성 서쪽은 흉노의 진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고, 만리장성의 동쪽은 고조선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수메르는 운석에서 철을 채취하였다. 지표상의 철광석을 제련한 것은 기원전 3천년경 이라크에서 였다. 그 뒤 담금질을 통해 강철 칼을 만들어 낸 종족이 아리안이었다. 그로써 그들의 이동이 세계를 재패하게 된다.

원래 철鐵의 옛 글자는 철銕이었다. 동이족의 쇠라는 뜻이다. 고조선은 일찍이 청동문화를 열었듯이 철기문화도 중국보다 일찍 열었다. 기원전 12세기경에 이미 강철이 고조선에서 생산되었다. 철 제련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중국보다 무려 7세기나 앞선 제련기술이다. 불의 온도를 높이는 기술을 일찍 터득한 덕분이다.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화덕을 만들어 철 제련기술을 발전시켰다. 바로 이 제련기술이 경제사는 물론 역사의 운명을 갈랐다. 훗날 고구려가 수양제의 백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제련기술로 얻은 강철 덕분이었다.

 

유리문화

고대 최고의 휘귀 장신구인 “유리”가 기원전 5세기무렵에 제작되어 사용했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분분석 결과 유리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령왕릉은 고대 유리제품의 진열장을 방불케 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제품은 여러나라 유리구슬이 혼재해있다. 크기나 색깔, 형태에서 무척 다양하고 화려하다. 백제가 동남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덕분이다. 기원전 3세기 즈음 이집트, 아시아, 이란,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한 구슬들은 우리나라에 2세기부터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해상강국이었던 백제의 무령왕릉은 말 그대로 문명의 용광로이고 집합처였다.(정수일 교수) 

 

철갑옷

고조선은 뼈, 기죽, 청동, 철 등을 재료로 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다양한 갑옷을 생산하여 주변 중국과 북방 및 일본 등에 영향을 주었다. 철갑 역시 고조선이 훨씨 앞선다. 기원전 3세기경 고조선 후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묘에서 찰갑(札甲) 이 출토되었다. 고조선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철갑옷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조선에 얇은 강철과 쇠줄으 생산해 낼 수 있는 철강 제련기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뒷날 고구려에서 세계 최강의 개마무사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고조선의 제련기술이 계승되어 가능하였다. 이에 반해 중국은 춘추시대까지 철갑을 만들지 못했다. 진나라 무사는 모두 가죽갑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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