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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뿌리깊은 우리역사” 1부, 동북아시아 시원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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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5-10-01 00:00 조회19,8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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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포/럼 


“뿌리깊은 우리역사” 1부, 동북아시아 시원문명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다. 앞으로 30년 전후로 펼쳐질 거대한 사회 변화(창조경제, 통일한국, 新동북아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과거 경제혁명을 통한 산업화, 정치혁명을 통한 민주화를 이루었으나, 선진화와 세계 화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선진화는 바로 올바른 역사문화를 다시 세우는 정신혁명의 기초 위에서 제 2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야 하지 않는가? 또한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된 뿌리없는 선진화, 세계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세계사의 보편 성 속에서 우리 민족사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어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갈 때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선진국가로서 지속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뿌리깊은 우리역사” 6부 시리즈를 통해 우리의 것을 찾아 미래 30년의 이정표로 삼고자 한다. 그 순서를 1부 동북아시아 시원문명, 2부 동방의 빛 고조선의 활약, 3부 고조선 이후 해양역사, 4부 잃어버린 역사관과 역사강 역, 5부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 6부 21세기 아시아인의 역할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 편집실 - 

 

바이칼호 

바이칼호 주변에는 고고학적 유적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3만 ~ 5만 전의 고고학적 유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는다. 

지구 마지막 빙하기가 오자 몽골리안은 바이칼호에 오 랜 기간 갇혀 살았다. 주변이 동토의 빙하가 되어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빙하기에는 바이칼호에 물 이 적었고 대부분 초원이었다. 초원은 오아시스 같은 장소였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 차오르자 바이칼호는 호수가 되었다. 그 둘레는 2,200km 최대 깊이 1,742m 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호수이다. 330개의 강 이 이곳으로 흘러 드는데 밖으로 나가는 수로는 앙가라강 하나뿐이다. 

바이칼호는 2500만년 동안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 물들이 진화되어온 진화박물관이자 원시생명연구소이다. 기원전 1만 4천년경 바이칼호수 연안에서 등장한 동북아 시아 쐐기형 석핵은 불과 1~2천년 사이에 티베트, 동북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예리하고 가벼운 창으로 기동력을 확보한 집단이 바이칼을 기점 으로 동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전된다. 

환단고기에 전하는 기원전 7197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국가 환국의 위치가 바로 바이칼호 주변이다.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풀리면서 이들은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갔 다. 동북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것은 1만4천년 전이다. 서쪽으로 간 몽골리안 국 가들은 핀란드, 헝가리, 터키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탄’ 자가 들어가는 나라들이다. 동이족의 중심지역도 남하하여 홍산문화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곳에 사람이 정착 한 것은 1만1천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바이칼 호수는 유러시아 유목민족들의 발원지이자 이동 경로였다. 조선족을 비롯하여 흉노족, 선비족, 훈족, 돌궐족, 위구르족, 거란족, 몽골족들이 그들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족은 바이칼 호수 남부의 오르콘강과 툴라강의 상류 초원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바이칼은 모든 몽골 인종의 근원지였다. 육당 최남선 선생과 봉우 권태훈 선생 등은 바이칼 호수 일대를 우리 민족문화의 발상지로서 주목한 바 있다. 현 중국의 동북3성 및 남부지역도 다 몽골리안들이다. 윈난성 일대 소수민족, 장족도 다 몽골리 안이고, 몽골, 중남미의 인디오 국가들, 동남아시아 베트남도 몽골리안 국가들이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 리안은 남방계 민족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다. 

한반도와 인도 남부인의 유전자 지도가 비슷하다. 고대 로부터 두 곳 간에 사람의 이동이 많았던 것을 뜻한다. 가야 왕국으로 시집 온 인도 공주 허황후의 이야기에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은 유전학적으로도 몽골리안 원형질을 가 장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인과 바이칼호 주변에 사는 브리야트인이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한다. 

 

1. 발해연안문명 

 

우리 동이족은 발해를 중심으로 동방의 고유문화를 창 출해왔다. 과거에는 동방문명의 기원을 중국 중심으로 보아, 중국의 문명은 황하문명, 장강문명, 주강문명, 요하 문명을 그 구성요소로 보았으나, 요하문명은 발해연안에 있는 하나의 부분적이며 국부적인 문화로 여겨진다. 『발해연안문명』의 저자 이형구 교수의 견해이다. 

다시 말해 동방문명의 중심권은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즉 발해를 끼고 있는 그 일대이다. 황하문명은 중국문명이다. 그러나 발행연안문명은 황하문명까지도 포함하고 요 하문명까지 포함하는 광의적인 문명권이다. 그 문명의 중심이자 주인공은 동이민족이라고 이형구 교수는 지난 30 년간의 연구에서 결론을 맺는다.

지중해연안문명은 북위30도(나일강 하류)에서 북위42 도(프랑스, 이탈리아)에 위치한다. 발해의 지리적 범위 는 북위 30도와 북위42도 사이로 지중해의 지리적 위치 와 거의 일치한다. 북위30도 아래면 아열대 지방, 대략 북위30~40도 사이는 온대지역이다. 지중해 나일강 하류 에서 이집트문명 발생하고 그리스로마문명은 이태리반도 와 그리스반도에서 발생하며, 스페인,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터키반도의 고대문명들은 모두 지중해를 중 심으로 그 연안지역에 문명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고대문 명으로 지중해연안문명과 발해연안문명이 동서양의 중요 한 중심문명 이라고 본다. 

요동반도와 한반도 일대에 고도로 발달된 문화는 산동 반도와 같이 공유, 교류했다. 경인문화권, 평양문화권, 대련문화권, 심양문화권, 천진북경문화권, 청도연대문화 권은 규모가 크고 모두 항구를 중심으로 동방 최고의 도시 들이 형성되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 안팎 거리, 2000km 범위 안에 있는 5개국(인구 15억명)의 100만명 이상 도 시가 147개이고, 이 도시의 인구만 3.9억명에 이른다. 

 

황해평원 

약 2만 년 ~ 1.2만 년 전의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현재 보다 120m 가량 낮았다. 그 무렵 황해지역은 큰 강이 흐르는 평야였다. 황하가 흘러 비옥했던 황해평원에 동아 시아 인류가 살면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꽃피웠을 가능성 이 제기된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에 질퍽했던 황해평원보다는 한반도 쪽이 살기 좋았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여러 문명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중국대륙, 한반도, 일본 열도, 대만 등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황해는 대 륙이었으며 동해도 호수였다. 1.2만년 전쯤 날씨가 따뜻 해져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일년에 5cm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안선과 해수면의 큰 변동이 생겨 오늘날과 비 슷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동해는 수심이 300m 가 넘지 만 황해는 최대 수심이 44m 정도이고 발해만의 평균 수 심은 22m에 불과하다.  

 

어장과 갯벌 

고대로부터 발해만은 동양 제일의 어장이었다. 세계 5 대 갯벌 지역은 미국 동부, 캐나다 동부, 아마존강 하부, 북해연안 그리고 우리의 서해이다. 갯벌은 생물 다양성이 발달되어 우리 조상들은 서해 갯벌 해산물로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갯벌에서 좋은 소금이 생산되었 는데 요동반도 쪽에 제염소가 많았다. 연근해 어족이 풍 부하여 고기잡이 배가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고기잡이가 발달하게 된다. 갯벌이 많아 배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 만 들어졌다. 우리 고대 선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저선 인 이유이다. 

 

농사와 소금 생산 

발해만 하천가에서 농사가 시작되고 소금생산이 이루어 져 근처에 비해 고대문명이 가장 먼저 자리잡게 된다 (발 해연안문명). 요하유역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면서 강 하류는 물론 상류에도 고대문명이 발생하였다 (소서하에 서 사작된 홍산문명). 더구나 발해만은 얕은 바다라 풍랑 이 적어 작은 배들도 연안항해를 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이로써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교역이 시작되 었다. 그리고 문물의 교환과 함께 문명의 전파도 이루어 졌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동이족의 근거지가 된 이 유이다. 

 

발해만으로부터 퍼진 동이족 

발해만 연안의 요서, 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 고대한국 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 요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요동반도 영구현 금우산 동굴유적, 본계시 묘후산 동굴유적에서 직립원인 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동북아 구석기시대 고인류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대릉하, 요하,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 등지에서 인류화석이 출토되었다. 이들이 동 방 인류 즉 동이족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발해문명을 창 조한다. 

대만의 사학자 서량지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은나라, 주나라 무렵 동이족의 활동범위는 산동반도, 하북성(북경 등지), 발해만 연안, 하남성, 강소성(상해 등지),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이다. 그 활동 중심은 산동반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동이족은 홍산문화 이전부터 발해만 일대에서 활동했 다. 기원전 7000년 이전에 발흥한 발해연안문명은 그 뒤 내륙으로 퍼져 소서하를 시작으로 내몽골 사해와 흥륭와 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기원전 4500년경에는 홍산문화가 무르익어 초기 형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고 조선의 모태 국가이다. 홍산문화나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원한 동이족의 문명은 그 본토에서는 고조선을 형성하 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중원 지역으로 들어가서는 하 나라를 정복하고 은(상)나라를 세웠다. 상나라는 황하 하 류의 산동반도 동이족이 상류의 하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나라이다. 이런 관계를 유추할 때 실제 문명의 연원은 고 조선에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무렵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황하하류 산동지역에는 동이족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동이족은 산동성을 중심 으로 중국문명의 핵심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한족은 이러한 강력한 동이족에 대하여 예로부터 경계심 을 갖고 경원하였다. 중국의 역사는 동이족과의 전쟁, 침탈과 교섭의 역사였다. 한중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홍산문화 최초의 문화인 하 가점하층(BC2000) 유물로부터 고조선의 유물이라 한 다. 또 강력한 국가 기틀이 발해만 연안에서 구축되어 대 륙을 평정했으며 조고선의 일파가 商나라를 건설한 것으 로 추론하였다. 商나라는 발해만 연안의 고대국가인 고조 선의 문물을 승계해 발달시키고 고조선과 무역을 하여 국 가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때 무역을 한 사람을 가리켜 商人이라 불렀다. 商人은 바로 商나라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2. 요하문명 

 

빙하기 이후 바이칼호를 떠나 인류가 동쪽으로 이동하 는 길목에 홍산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요령성 조양시 일대인 홍산후 지역에서 홍산문화 가 1980년대부터 본격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제 5% 정 도 발굴이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도 세계 4대 문명에 1~2 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으로 밝혀졌다. 발굴 진행 에 따라 연대가 더 올려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요하, 대릉하 유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 명이라 하여 제 5의 문명, 요하문명이라 지칭한다. 정봉 시는 요하문명, 조양시는 능하문명이라 부른다. 지금까 지 알려진 황화문명, 장강(양자강)문명 역시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요하문명과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홍산문화는 단壇(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 묘廟 (여신을 모시는 사당), 총冢(적석총)으로 상징되고, 이는 건국 전야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중국의 한족과 달리 적 석총 묘제는 한민족의 유산이다. 중국 전역을 통틀어서 5 천년 전 건국을 상징하는 유적이 발굴 된 곳은 동북방의 발해 모퉁이에 있는 홍산문화 유적이 유일무이하다. 

고고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기 이전 에는 중원의 앙소문화가 중국문명을 대표하는 문화로, 황하의 상중류가 중 국문화의 발상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단, 묘, 총과 같은 고고유물의 발굴을 통해 동북방의 홍산문화가 동양 역사 문화의 발원지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홍산 지역은 오늘날의 내몽고 남쪽, 하북성 동쪽으로 농경과 수렵이 동시 에 가능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초원 이 있고 서쪽으로 들어가면 농경지대 가 있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면 발해만 이 있어 농경과 목축과 수렵이 동시에 가능한, 드넓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혜의 땅이다. 이런 좋은 조 건을 바탕으로 선진적인 문화가 발달 하였다. 따라서 중원이 아닌 이 곳 동 북방 요서에서 동아시아문명의 서광 이 최초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홍산문화는 광의로 기원전 7000년 경 소하서문화에서 시작되는 신석기 문화에서부터 기원전 2000년의 하가 점하층문화에서 나타난 청동기문화에 이르기까지 요서지역의 새롭게 발견 되는 문화를 통칭한다. 협의로는 신석 기·청동기 병용 시대인 기원전 4500 년에서 기원전 3000년까지를 홍산문 화라고 한다. 

각 문화의 시작 연대는 논문마다 다 소의 차이는 있으나 2006년 유국상(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흥륭와문화 등 유적 직 접 발굴)이 발표한 “서요하 유역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고고학 문화개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➊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 ~ 기원전 6500년) 

소하서문화는 1987년 내몽고 적봉시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한기 소하서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2004 년에 논문 발표에 의해 기원전 6500년까지 올라가는 동 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기존의 흥륭와문화(기원전6200~기원전5200년) 보다 약 300년 앞선다는 것이다. 2006년 논문에서는 기 원전7000년까지 올려보고 있다. 이는 황하유역의 앙소 문화,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문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서 는 문화이다. 

소하서문화는 이후 흥륭와문화, 사해문화, 부하문화, 조보구문화,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이 소하서문화에서 보 이는 반지혈식 주거는 흥륭와문화에서 어마어마한 집단 주거지로 바뀌어 사해문화, 조보구문화로 이어지고, 흙으 로 만든 얼굴상은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지에서 실물 1~3 배 크기의 여신상으로 등장한다. 

 

➋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 ~ 기원전 5200년) 

흥륭와문화는 1982년 대릉하의 지류인 망우하 상류 우 측 연안 구릉에 위치한 흥륭와촌(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 흥륭와촌)에서 처음 발견된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 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중국 연구진에 의하면 세계 초 고의 옥 귀걸이, 중국내 가장 규모가 큰 집단 거주지, 최 초의 용 형상물(저수룡), 동북아 최초의 빗살무늬토기 등 이 발굴되었다.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에서 사용된 옥은 적봉시에서 450km 떨어진 수암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기원전 62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는 요하 일대의 신석 기를 주도한 세력이 요동 지역 신석기인들과 연결되어 있 었고, 이들은 후에 예·맥족과 연결된 사람들이었음을 보 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이와 비슷하거나 앞선 시기에 거 의 같은 모양의 옥 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 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한반도 최초의 신석기시대 옥 귀걸 이가 바로 그것이다. 또 기원전 4000 ~ 기원전 3000년 경 유적으로 추정되는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의 안도패 총에서도 흥륭와와 문암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또한 러시아 아무르 지역에서 출토 되는 옥 귀걸이와도 유사하여 이는 만주지역과 연해주 일 대 그리고 한반도 지역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 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륭와문화에서 발견된 것과 거의 똑같은 옥 귀걸이는 많은 시간차를 두고 있지만 중국대륙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5000 ~ 기원전 4000년경 양자강유역, 기원전 2500년경 광주 근처 주강유역, 기원전2000년경 월남 북부, 기원전1000년경 중국 서남부의 운남성 일대와 월 남남부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일본열도에서도 흥륭와문 화에서 출현한 1000년후에 똑 같은 모양의 옥 귀걸이가 출현한다.  

옥 귀걸이의 출토와 그 연대를 비교연구해 보면, 기원전 6000년경에는 요서, 요동, 연해주, 한반도가 동일문화 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암리유적은 흥륭와와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더 앞선 시기에, 중국 장강유역이나 일본 열도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중국내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 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는 주변을 파서 물길을 두르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대성곽 주변을 두르던 해자 의 원형이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기원전6000년경에 이미 집단적인 주거지를 만들어 정착생활을 했다. 해자 를 만들어 적과 사나운 동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였다. 

“최초의 용 형상물(저수룡)”이 발견되었다. 머리 부분에 는 야생 멧돼지의 두개골을 놓고 몸통은 에스(S)자 형태로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사해문화(기원전5600년 ~ )에서 나오는 돌로 쌓아 만든 석소룡에 비하면 진정한 용 형상물이라 보기 어려운 과장된 면이 있다. 

“동북아지역 가장 이른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원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남단 → 만주지역 → 한반도 → 일본으로 이어지 는 북방문화 계통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유 적, 조금 늦지만 기원전6000년까지 올라가는 강원도 양 양군 오산리유적(기원전6000~기원전3000년)에서도 거 의 비슷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다. 요서지방 고대문명이 황하문명과 전혀 다른 특징으로, 세석기문화, 용과 옥 그 리고 조상을 숭배하는 예의풍속, 평저통형토기와 지자문토기 등을 들 수 있다. 세석기도 유라시아대륙의 초원과 중국의 내몽고, 영하회족자치구, 감숙성, 청해성, 신강, 티베트, 흑룡강유역 등에서 발견되는 북방문화 계통이다. 

빗살무늬토기와 세석기는 요하일대 신석기문화에서는 대부분 보이는 것이지만, 황하일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북 방문화 계통이다. 결국 기원전 6000년경 당시부터 이미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엮는 발해만 연안은 중원 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후대의 예·맥족으로 이어지 는 것이다.

 

➌ 사해문화(기원전 5600년 ~ ) 

사해문화는 1982년 요녕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돌로 쌓은 용 형상물인 석소룡과 도기파편의 부조 용문양이 발굴되었 고, 흥륭와 다음으로 오래된 옥 귀걸이가, 흥륭와 다음으 로 오래된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중국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용 형상물은 대부분 요하지 역에서 발견되며 특히 홍산문화 옥저룡의 수량은 어마어 마하다. 중국 전역에서 발견되는 용 형상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부터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요녕성 부신 사해유적의 석소룡(기원전 5600년경) → 중화제일용(이후) 

- 하남성 복양시 서수파의 방(조개껍데기)소룡(기원전 4400년경) → 천하제일용 - 하북성 황매현의 석소룡(기원전 4000년경)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소산유적의 도준용문도(기원전 4000년 이상) 

- 요녕성 능원현과 건평현 사이 우하량유적의 다양한 옥저 룡(기원전 3500년경) 

- 내몽고 옹우특기 삼성타라촌 옥조룡(기원전 3000년경) → 중화제일용(이전) 

- 요녕성 건평현에서 채집된 옥저룡(기원전 3000년경) 

- 안휘성 함산능가탄유적의 배형옥룡(기원전 3000년경) 등 

흥륭와에서 2003년 발굴된 저수룡은 진정한 용 형상물 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서수파 방소룡이 발굴된 무덤 주인의 좌측에 용 형상이 있고 우측에 호랑이 형상이 있 어 사신도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가원했다는 논문이 발표 되기도 했다. 

복양시는 천하제일용의 발굴을 기념하여 중국용향 기념 비, 천하제일용 조각상을 세웠다. 그러나 1994년에는 이 보다 거의 1000년 이상 앞서는 용형상물이 발견되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서수파에서 사해문화로 넘어간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해서인지 그들은 서수파의 방 소룡도 아직 중화제일용이하고 부른다. 이제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의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이라 부르고 있고, 요하일대가 “용문화의 기원지”라는 것 을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흥륭와문화의 중화제일촌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사해 문화 유적지를 요하제일촌이라 불렀다. 사해문화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흥륭와문화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요서지역 신석기문화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지자문토기가 발견된다.  

 

➍ 부하문화(기원전 5200 ~ 기원전 5000년) 

부하문화는 적봉시 파림좌기 호이토향 부하구문에서 최초로 발견된 기원전 5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지는 부하구문, 금구산, 남양가 영자 등 세 곳이다. 

부하문화가 주목받는 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점을 치는 뼈’인 복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골은 북방에서 시작되어 상나라를 통해서 중원지역으로 내려간다. 주나라가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지고 말지만 북방문화의 전통 이 강한 부여나 북방문화가 남하한 백두대간 동쪽의 변한 과 가야 등에서는 삼한시대까지도 발견된다. 오늘날 골복 의 전통은 시베리아의 동북단에 사는 코리야크족과 춥지 족 사이에 남아 있고 베링해를 건너간 북아메리카의 인디 언들에게도 남아 있다. 골복의 실물은 변한-가야 지역인 창원, 부산, 해남, 남해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일본 서부 지역의 미생시대 후기의 유적은 변한-가야의 전통이 해로 를 통해 전파된 것이라 보고 있다. 중국은 골복의 전통이 주나라 이후에 없어지고 주역의 근원이 되는 서법으로 바뀐 것을 감안하면, 신석기 이래로 요서지역을 포함한 만주 지역과 한반도가 동일문화권 지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➎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 ~ 기원전 4400년) 

조보구문화는 적봉시 오한기 고가와포향 조보구촌에서 발견된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이다. 

첫번째 특징은 최초의 봉황 모양의 토기가 나왔다는 것 이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요서지역 최초의 채도가 발굴된 점 이다. 요서지역 신석기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인 빗 살무늬토기, 지자문토기, 세석기 등이 모두 나타나고 여기에 이제까지 보이니 않던 그림이 그려진 토기인 채 도가 최초로 보이기 시작한다. 황하유역 앙소문화(기원 전4512~ 기원전2460년)의 채도보다 빠르다. 기원전 5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황하중류를 통해 조보구문화와 앙소문화가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아시아 지역의 채도 중 가장 빠른 것은 기원전 7000 년경에 등장하고 기원전 6000년경에는 여러 지역에서 많 이 출토된다. 중동,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천산 과 알타이산 사이, 몽골초원, 대흥안령산맥 남단, 요서지 역이라는 길을 따라 독자적으로 전파 혹은 전래된 문화는 대부분은 한반도, 연해주, 일본으로까지 연결되고, 일부 는 와이형문화벨트를 따라 중원지역과 연결되고 일부는 남하하여 산동반도를 거쳐 장강 하류로 연결된다. 

정형진은 채도문화와 함께 중원으로 들어와 앙소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바로 각종 사서에서 공공족共工族으 로 기록되는 집단이며 이 공공족이 단군신화의 환웅족이라고 보고 있다.  

세번째 특징은, 신령한 동물들을 도안화한 그림이다. 사슴, 멧돼지, 새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 다. 중국학자들은 이것을 사슴머리의 용인 녹수룡, 돼지 머리의 용인 저수룡, 새머리의 용인 조수룡이라 부르고 이것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용과 봉을 상징하는 도안이 라고 보고 있다. 

조보구문화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홍산문화이다. 그러 나 조보구문화의 채도는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단순한 채 도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➏ 홍산문화(기원전 4500 ~ 기원전 3000년)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로 내몽고와 요녕성의 접경 지역인 적봉, 조양, 능원, 객 좌, 건평 등을 중심으로 분포된 유적지를 말한다. 

특히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만기(기원전3500~기 원전3000년)의 우하량유적은 거대한 제단, 여신묘, 적석총이라는 단묘총 삼위일체의 거대 유적을 갖추고 있어 초 기국가단계 혹은 초기문명단계에 진입했다고 보는 사람들 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청동기가 아닌 동을 주조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신석기가 아닌 동석병용시대로 분류 하고 있다.  

우하량유적은 1979년 요녕성 조양시 객라심좌익 몽고 족자치현(현재는 객좌현) 동산취촌 뒷산 정상에서 대형 제단유적인 동산취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어 1986년 7월 24일 동산취유적에서 50km 떨어진 능원현과 건평현의 경계지역인 우하량촌에서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이 발굴되었다. 중국은 중화 문명의 ‘禮制의 기원’ 더 나아가 중화문명의 기원이 이 곳에서 출발한다고 보기 시작하였다. 

우하량유적은 기존에 3황 5제의 신화시대를 운운하던 기원전 3500년에 계급이 완전 분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미 ‘초기국가단계’ 혹은 ‘초기문명 단계’에 진입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에서는 황하유역의 하나라에서 시작해서 상나라와 주나라로 이어지는 고대 국가 단계를 설정했었다. 하지만 우하량유적지의 발견은 이런 정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중국은 기원전 4000년경의 황하유역 앙소문화를 중국 문화의 시발점이자 중화문명의 고향이라고 보아왔었다. 그러다가 1973년 장강 하류에서 기원전 5000년경의 하 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앙소문화와 하모도문화 지역을 중 화문명의 2대 원류지로 보아왔었다. 그러다가 요서지역 에서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등이 연이어 발견되자, 중 국은 황하유역의 앙소문화 지역, 장강유역의 하모도문화 지역, 요하유역의 홍산문화 지역을 중국문명의 3대 원류 로 보게 되었다.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은 이보다 앞선 소하서문화, 흥륭 와문화, 사해문화, 부하문화, 조보구문화 등을 계승 발전시켜 온 ‘홍산문화의 꽃’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약 5500년 전에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우하량 홍산문화 유 적지”라는 문구로 소개하고 있는 우하량 제2지점은 직경 이 20 ~ 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현재도 계속해서 발견되는 곳이다.  

우하량 제단은 3원 구조로 된 거대한 원형제단과 방향 제단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원형이자 만주족이 세운 북경 천단 구조의 원형이라고 보고 있다. 북방 소수 민족들의 신화, 전설 등에서는 3, 9, 81 등의 수가 반복 적으로 중요한 聖數로 등장한다. 이런 ‘3수 분화의 세계 관’은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내몽고 지역의 신석 기 시대 홍산문화의 옥기에서도 이미 보인다. 북방문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북방 샤머니즘의 고유한 사유체계인 ‘3 수 분화 세계관’은 장안의 천단구조가 4단 혹은 5단 구조 에 한 층이 12등분되어 있는 구조와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우하량 제2지점에서는 많은 옥기(옥저룡)들과 동물 조 각상이 발견된다. 이 옥저룡들은 1971년 옹우특기에서 발굴된 중국 최초의 용 형상물의 다양한 변형이다. 옥기 는 곰 형상의 옥웅룡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고 곰의 아래턱뼈 등도 발견된 점으로 보아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인 곰 토템족은 단군신화의 웅녀족일 가능성이 있다. 에뱅키 족 등 북방 소수민족들 가운데는 지금도 곰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민족들이 많다.  

옥기들이 발견되는 적석묘와 석관묘 형태는 요서지역에 서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중원지역에서는 발 견되지 않는다. 적석총은 예, 맥과 고구려, 백제, 일본으 로 이어지는 북방계통의 묘제이다. 적석묘 혹은 적석총의 분포 지역은, 내몽고 동부에서 요서, 요동 반도 일대, 특 히 평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 중심지인 집안시 일대에 수 천기가 남아 있고, 여명문화 유적이 있는 통화현 일대에 도 수 백기가 새로 발견되었고, 한강 유역의 한성백제 시 기의 송파구 석촌동 일대, 그리고 일본에도 고구려, 백제 계 유민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1,500여기의 적석묘 가 산재해 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것은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지의 적석묘 무덤군으로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여신묘 유적지” 여신묘 유적에서는 거 대한 신전터와 다양한 여신상이 발굴되었다. 여신의 두상 에서 눈동자는 옥으로 둥글게 다듬어서 박아 넣었다. 이 여신묘에서는 벽화의 흔적도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북 최 초의 벽화라 할 수 있다.

“거대 적석총 유적지”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2000~ 기원전1500년)와 하가점상층문화 (기원전1500~기원전 700년)는 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는후속문화로, 이 지역 에서 발원한 단군조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 위영자문화 지역 등이 바로 비파형동검이 나오 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발견 현장에 일본학자들은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없다. 

 

➐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 ~ 기원전 2000년) 

소하연문화는 동석병용 시대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 대를 잇는 고리 역할을 한다. 소하연문화를 뒤이어서 초 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2000~기원전 1500년)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시기에는 이미 고급문명 사회에 진입했다고 본다.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갑골문 이전의 원시 상형문자인 도부, 도문 혹은 도부문화의 발견으로 많은 학자들은 한자 의 기원인 갑골문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동이족들이 요서 지역에서 남하하면서 상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이제 상식 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도부 문자는 갑골문자의 전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여명문화 

 

1995년 6월 길림성 통화시 통화현에서 기원전 2000 년까지 소급되는 40여기의 고대 제단과 수백 기의 취락 유적과 적석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초기 고구려 유적들 이 산재한 지역에서 가까운 통화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의 적석묘가 고구려 적석묘의 원형이 될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명문화는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요녕성 서부의 홍산문화와 서로 연원 관계에 있고, 발견된 세 유형의환형 제단이 우하량 홍산문화의 제단, 신전, 고분과 매우 흡사하여 우하량 홍산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 제 단 유적을 건설한 종족은 고문헌에 나오는 맥족 계통으로 보인다. 

적석묘 혹은 적석총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견주어 흔 히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적석묘의 분 포지역은 내몽고 동부에서 요서, 요동반도 일대, 특히 평 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 중심지인 집안시 일대에 수천기가 남아 있고, 여명문화 유적이 있는 통화현 일대에서 수백기가 새로 발견되었고, 한강 유역의 한성백제 시기의 송파구 석촌동 일대, 그리고 일본에도 고구려, 백제계 유민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1500여 기의 적석묘가 산재해 있다. 

적석묘가 발견되는 지역은 기마민족의 이동 경로와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 계통의 민족 이동과도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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