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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우리 역사의 정체성 찾기” 4부, 세계화에 걸맞은 창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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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5-07-01 00:00 조회18,8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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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포/럼


“우리 역사의 정체성 찾기”

4부, 세계화에 걸맞은 창조역사관

 

지난 수천 년간 분쟁과 정복의 동서교류 역사는 이제 상생과 공존을 모색하는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 이른바 세계화

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흐름이다. 그러나 올바른 세계화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벌

어진 역사 왜곡과 사관의 뒤틀림 현상을 바로잡고 새로운 문명사의 탄생을 향한 역사관을 모색해야 한다. 더 좋은 세

상을 만드는 모두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이다.

1부, 인류 20만년의 여정

2부, 인류 고대 뿌리문화의 원형

3부, 유라시아 민족의 친연성

→ 4부, 세계화에 걸맞은 창조역사관

5부, 동북아시아 문화중심국가로 가는 길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산업혁명 이후 역사는 세계화라는 하나의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토마스 프리드만은 국가의 세계화(세계화1.0), 기업의 세계화(세계화2.0), 개인의 세계화(세계화3.0)로 나아간다고 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제의 세계화를 기원하였다.

인류 문명이 접촉과 교류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에는 실크로드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는 동서 무역을 통해 인류의 삶을 더 좋게 하고 문화의 융합을 통해 또 다른 문명을 창조하는 진보의 과정을 걷게 하였다. 실크로드는 대륙에서(실크로드1.0), 바다로(실크로드2.0), 위성으로(실크로드3.0) 나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는 실크로드의 노상에 있었을 때 흥하고 그 변두리나 단절된 곳에 위치할 경우 이로 인해 정체 또는 쇠퇴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다음에 올 실크로드를 건설하고 세계문명의 창조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역량과 조건을 갖춰야 할 것인가?

 

실크로드1.0

 

자연은 강의 물줄기를 만들고 인간은 북방 초원의 길, 사막 오아시스의 길, 바다 도자기의 길을 만들어 왔다. 기원전 5세기 이전과 기원후 10세기 이후에는 초원의 길이주축이 됐다. 그 중간에는 오아시스의 길이 중심이 됐다.

초원의 길은 북방민족들이 개척하여 중국에 한나라가 들어오기 이전의 문명 교류의 주요 통로였다. 10세기 이전 중국의 수도는 대체로 장안이었으나 10세기 이후에는 북경으로 이동한다. 이는 실크로드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다의 길은 중국 후한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육상 실크로드가 막히자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14세기 ~ 16세기 서양의 중세가 어둠의 시기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 중국은 1368년 원나라를 물리친 후 명나라를 세워 중국 토착 민족인 한족(漢族)의 지배를 회복하고 황실 통치의 권위를 재차 확립했다. 명나라는 서쪽과 남쪽의 변방으로, 제국의 영역을 비단길을 통해 확장해 나갔고 이슬람 사람 환관 정화(1371~1433년)는 선박 3,500척과 인원 3만 명의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하여 바닷길을 넓혀갔다. 그러나 바다를 통한 동양의 세계 진출은 여기에서 그쳤다.

 

실크로드2.0

 

세계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계기는 신대륙 발견과 유럽인이 동양으로 가는 새 항로를 발견한 후부터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해상에서의 실력을 앞세워 차례로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인도 항로 발견을 위해 각축을 벌였다. 에스파냐에 머물던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고자 1492년 8월 3일 팔로스 항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하여 2개월 후인 10월 12일에 카리브 해의 산살바도르에 도착함으로써 예기하지도 않았던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1497년 7월 8일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는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서부를 남하하여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남서 해안 항구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그 뒤 다시 희망봉을 돌아 약 26개월 후 1499년 9월 초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1500년 3월 9일에 카브랄과 디아스는 브라질을 발견하였고 인도 왕복을 마치고 1501년 7월 1일경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대항해 시대는 1400년대 선박, 나침반,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후 산업혁명의 원료와 시장개척을 위한 식민지 개척의 역사로 접어들면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유린이 시작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확장되었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시대가 펼쳐졌으며 동양의 서구화가 확산되었다. 영국이 차지한 영토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분할되고 현대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30년 전쟁(1945 ~ 1975년)과 동서냉전기를 겪은 이후 세계는 다시 중동전쟁으로 분쟁이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의 국제 긴장은 중국의 부상, 미국의 역할축소, 일본의 재무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치닫고 있다.

 

실크로드3.0

 

인류역사는 순환한다. 그 순환의 중심에 실크로드가 있다. 주로 아시아 북방민족이 개척한 실크로드(1.0)는, 신대륙 발견과 산업혁명에 힘입어 바다의 실크로드(2.0)를 통한 무역이 확대되자 동양은 역사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17세기 이후 동양에 뒤쳐져 있던 서양의 반격이 시작되고 이어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현대국가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미국의 힘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제 수퍼차이나의 부상은 동서양 반전을 예고한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은 중국이 주축이 되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 경제를 육로와 바닷길로 연결시키는 개발•협력 프로젝트다. 시진핑 중국주석의 야심 찬 글로벌 전략으로 신(新)실크로드로 불린다.

다가올 통일 한국은 중국, 동북3성, 연해주, 일본과 동남아를 잇는 중심에 서게 된다. 허브&스포크 실크로드를구축할 호기를 맞이하게 된다. 더욱이 지정학적 불리점도 극복할 수 있는 정보화시대의 경쟁력코드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는 네트워크형 실크로드를 주도함으로써 고대 유라시아 공동체의 문화원형을 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동서문명의 대회전

 

동서문명의 충돌은 1750년까지 동양이 서양을 앞섰지만 이후 선박 기술, 석탄 에너지원의 개발과 이를 통한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 등으로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갔다.

지난 19세기 산업화로 기술과 부를 축적하여 시장개척에 나선 서양은 동양을 무력화 시켰다. 1870년대 이후 대영제국의 시장을 미국, 독일, 일본 등이 공략하면서 결국 2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서양은 과학화와 산업화, 동양은 서양에 의한 서구화 과정을 거치면서 동양은 급속한 경제발전에 힘입어 21세기 말에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부의 수준이 비슷해져 갈 것으로 내다본다.

우리에게 아픈 역사를 남긴 지난 100년에 걸친 1,2차 세계대전과 동아시아 30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끊어졌던 역사의 맥을 다시 찾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서양의 문명을 따라 배우던 입장에서 이제 우리 동양의 것을 서양인에게 가르쳐줄 때가 되었다.

 

아시아 역사 왜곡과 훼손

 

18세기는 바다의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서양과 동양이 표면적으로 무역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실제로 이 당시의 역사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자원의 침탈, 아프리카 원주민의 노예화, 국권의 강탈 등 야만과 폭력의 역사로 기록된다. 과거 250년간

에 걸친 동양의 서구화는 무역자본에 힘입어 획득한 기술과 자본을 앞세운 제국주의의 팽창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역사를 왜곡, 훼손하는 인류문명역사의 후퇴를 저지르는 결과도 동시에 낳았다.

중국은 자신의 영토에 살고 있는 이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영토사관의 탐욕을 저지르고 있고, 일본은 식민사관을 만들어 한국과 동북아 역사를 훼손하였으며, 러시아는 제정러시아에서 소비에트연방 시절까지 중앙아시아 민족의 역사를 단절시켰고, 유럽 등 서양은 문화적 우월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인도 등 동방의 역사를 폄하하였다.

 

서양 중심의 편협한 역사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의 저자 김정민 교수는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현존 국가와 민족, 그리고 고대 이들의 뿌리문명과 민족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내는 연구 작업을 시도하여 유라시아 문화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많은 단서를 찾아냈다.

수메르 제국을 건설한 민족은 대홍수 이후 티베트에서 내려온 민족이 아프카니스탄에 거주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이주한 민족이라 한다. 그래서 수메르인은 동방으로부터 온 민족으로 중앙아시아인들과 언어, 문화가 같았다. 고대인도문명, 수메르문명, 이집트문명, 그리스로마문명을 건설한 주역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동유럽 각국의 신화를 종합하면 이들은 인도-유럽어 계통이 아니라 알타이-투르크계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수메르, 스키타이,투르크 민족과 관련이 있고 훈족과 징기스칸 이후의 몽골족도 동유럽 민족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현재 드라비다어족은 대부분 인도의 남부 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인도 전체가 드라비다어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도 드라비다어족은 전 인도지역, 파키스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

서양의 일부 학자들은 세계 4대 문명은 각자 독자적으로 탄생한 다른 문명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메소포타미아, 황하, 인더스, 이집트 문명의 원류를 제공한 아시아 동북방에 있었던 최초 고대 문명의 실체에 대해 함구한다. 고대인더스문명의 건설자가 드라비다어족이고 알타이-투르크계 언어와 친연성을 인정하게 되면 고대인더스 문명을 건설했던 민족과 나머지 3대 고대문명(황하, 수메르, 이집트)를 건설한 민족이 하나의 동일 문화권을 가졌던 민족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리아인을 이끌고 유럽으로 서진해 들어간 훈족은 몽골계 아시아인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백인은 대체로 핀란드 지방 등 북유럽에서 왔다. 현재 지구상에 아리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금발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심지어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도 한 번도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민족이다.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앵글로-색슨 계열의 영국, 독일, 러시아제국이 성장하면서 빈곤한 자신들의 역사를 포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정치적 선전에 불과한 것이다.

투르크계 민족과 아리아인은 언어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인종적으로는 같을 가능성이 높다. 투르크인들이 북유럽으로 진출했었던 흔적은 현재 핀란드와 북유럽에 사는 라프족이 그 예이며 그 외에 슬라브족과 바이킹 신화가 알타이-투르크 신화와 유사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나타난 징기스칸의 몽골군대가 헝가리 제국의 5만 명의 정예 후사르 기병대를 전멸시키면서 유럽에는 군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공백의 상태가 몇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소수의 바이킹족이 유럽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이에 대항할 군대가 없어 유럽의 많은 도시는 바이킹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백인의 비율이 남부지방과 동부지방으로 확산된 것이 아닌가 보인다. 러시아에 백인이 많은 이유도 현재의 러시아를 건설했던 주역이 바이킹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만들어낸 아리아인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동쪽으로부터 유입되어 들어오던 아시아계 기마민족에 대

한 반감과 두려움에서 나온 민족의 개념일 뿐이다.

로마제국을 건설했던 에트루스칸인들이 현대 이태리인들보다는 그리스 남동부 지방 사람들과 유전인자가 비슷하다고 한 점과 고대 라틴어가 현대 이태리어를 포함한 유럽의 어족과 문법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이 금발의 백인도 검은 머리의 아리아인도 아닌 알타이-투르크 민족이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세계사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백호주의자들이 만들어 허구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중동 역사의 폄하

 

앗쌀라무 알라이쿰!(Assalamu Alaikum, 신의 평화가 그대에게)의 의미는 나는 너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이슬람 인사말이다. 이슬람 세계는 57개 UN 정회원국, 아랍 22개국으로 구성되고, 15억의 세계 최대 종교인구를 갖고 있어 이슬람의 평화가 곧 지구의 평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동의 역사는 바빌로니아(BC1800), 히타이트(BC1600),페니키아(BC1200), 헤브라이(BC1000), 메디아, 아시리아(BC800), 페르시아(BC600), 알렉산더에 멸망(BC325), 파르티아, 사산조페르시아 (AD300), 아랍에 멸망(650), 몽골침략(1258), 오스만제국 등장(1300),비엔나공정 실패(1683),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23년 터키 공화국과 22개 아랍국가 독립으로 이어지는 인류 5천년 중 4800년 동안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 로마, 동로마(비잔틴), 합스부르그, 1차 세계대전

으로 이어지는 서양중심으로 기술된 역사는 주변부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중세 이슬람 문명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지적원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1200년 동안 서구를 지배한 이슬람 세계를 현재 중동의 화약고와 인간차별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서양의 시각은 어찌 보면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동의 아랍국에게는 미국 등 서구에 의한 석유이권의 탈취 피해정서가 존재하고, 친이스라엘 정책에 반하는 이중기준, 22만명의 민간인 희생(100만 가족의 고통, 1명의 테러리스트 사상은 8~9명의 민간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대테러전 비용으로 3.4조 달러를 퍼붓고 있다. 이로써 중동은 서양의 자국이 익 논리와 경제적 이윤동기를 앞세워 인륜적 폐륜이 가장

거대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슬람 문화의 전문가 이희수 교수는 말한다. 이제부터는 공존을 위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슬람 문명을 종교적 도그마가 아닌 문화적 파트너로 보고 접근해야 하고, 적대적 이해당사자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아닌 우리 자신의 시선과 인식을 구축해야 한다. 서구(미국) 중심의 논리에서 인류의 보편가치로 조망하고 테러중심의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벗어나 인문학적 심층 이해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슬람 세계는 미래전략의 파트너가 될 인류 보편사를 충분히 갖고 있다. 이슬람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들여다보면서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문화전략적 시각이 성숙된 국민, 경쟁력과 품격을 갖춘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겨진다.

 

원그로브를 향한 창조역사관의 정립

 

21세기는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사는 세계화의 시대이다. 고대 12환국이 분할된 이후 인류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터전에서 살다가 이제 과학기술의 덕분으로 만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다시 하나로 만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계인류를 지구촌의 한 가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필요하다.

그 간 인류문화의 역사는 사실과 달리 많은 훼손과 왜곡의 파란을 겪어왔다. 부족한 사료와 유물, 민족우월주의, 국수주의, 식민주의 등 불순한 의도에 의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았고 국민교육에 이용하였다. 동양에서 중국은 고대역사 일부, 원, 명, 청나라 이후, 일본은 일본사기,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에서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더욱 극심하게 역사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실과 사관을 뒤틀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역사를 정치적 목적이나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은 하늘의 뜻 즉 창조자의 진실에 역행하는 것이다. 역사의 역할은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뺏고 빼앗기는 역사가 아니라 서로가 공존과 상생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른바 창조사관이다.

역사적 서술이 아직 미흡한 고대 환국의 역사는 이름을 달리 붙여도 좋겠지만 서양인의 역사도 아시아인의 역사도 아닌 인류 공동의 역사라고 해놓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유라시아 문화 공동체의 잊혀진 역사는 전 세계 모든 인류와 연관이 되어 있어 앞으로 역사연구는 민족주의적, 영토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주의적, 창조주의적인 시각에서 정치적 목적을 배제하고 접근하여 미래문명전략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찾는 것을 대전제로 기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창조 패러다임에 바탕을 두고 온 인류가 만들어 나갈 창조적 미래를 건설해 나가기에 앞서 과거의 인류 공동의 역사 즉, 창조역사관을 바로 세울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 “우리역사 정체성 찾기”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역사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문화중심국가로 부

상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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