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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論語散策”여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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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15-06-01 00:00 조회18,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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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포/럼


“論語散策”여섯 번째 이야기 

 

- (사)CEO지식나눔 이사회멤버 민경조 - 

 

舜임금의 無爲之治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論語 衛靈公篇-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애쓰지 않고도 잘 다스린 사람 은 舜임금이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였겠나? 자신을 恭遜히 하고, 바른 자세로 南쪽만 바라보고 않아있었을 따름이었다” 舜임금은 가만히 남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堯임금에 이어 순임금도 그 재임기간 에 태평성대의 제 2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를 잘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南面이라는 말은 임금노릇을 의미하며 北 面이라는 말은 신하노릇을 의미하게 되었다. 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아 있었으니, 신하가 임금을 뵐 때는 늘 北 面의 위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북반구에서는 적도가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향을 선호했을 것이고, 가장 권한이 컸던 임금이 남쪽 을 향해 앉아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생활상식이 되었을 것이다. 각종 사무실 비품을 배치하는 데에도 위의 방식이 채택되고 있는 현상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太平聖 代를 이룩했었다는 그 시대에 임금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팔짱만 키고 남쪽 만 바라보고 앉아있었는데도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 을까? 임금과 臣下間에 또 政府와 百姓間에 확고한 信賴 關係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德治를 했다는 사실은 임금이 솔선(率先)하고 성실(誠實)한 자세로 정치를 했다는 사실로 요약된다(信 義, 誠實, 信賴. 率先). 즉, 相互信賴를 바탕으로 철저한 權限委讓이 이루어지고, 率先하는 자세가 있었으리라 생 각한다. (王者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개인을 생각 하기 전에 먼저 組織을 생각해야 한다.) 

 

三峯 鄭道傳의 冢宰政治 

子張曰 書云 高宗諒陰三年不言, 何謂也? 

 

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 以聽於冢宰三 年. -論語 憲問篇-

 

자장이 말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殷)나라 고 종이 양음에서 3년 동안 거상(居喪)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어찌 고종뿐이겠느냐? 옛 사람들은 모두 그러 했다. 임금이 죽으면 모든 관리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총 괄하여 재상 즉 천관총재(天官冢宰)에게 보고하고 그 명 령을 듣기를 삼년이나 했다.” 임금이 정치를 실질적으로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전적으 로 총재에게 위임하여 부득이한 임금 부재 시에 훌륭한 정치를 수행해 나갔다. 이상적인 왕정형태로 생각했던 정도전, 그러나 이러한 삼봉의 계획은 꿈에 그치고 수포로 끝나게 된다. 왕권정치가 계속되기를 지향했던 이방원의 견제에 결려 신권정치를 꿈꾸었던 정도전이 몰락한 것이다. 왕권정치의 폐단 즉 암군(暗君)이 나타나면 왕조의 영속 성을 보장받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왕은 군림하고 똑똑한 신하들이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정치체제를 꿈꾸었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절대군주정치가 성행하던 당시에 요즘의 입헌군주정치를 제의한 정도전의 생각은 조금은 시대를 앞서간 느낌은 있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었던 혁신적인 생각이 었다고 생각된다.  

 

參考事項(참고사항) 

1. 陽陰(양음)이란 諒闇(양암) 혹은 梁闇(양암)으로도 쓰며, 부모 의 무덤 곁에 墓幕(묘막)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服喪(복상)하는 것 을 말한다. 

2. 薨(훙)이란 임금이 죽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 후에 天子(천자) 가 죽은 것은 崩(붕)이라 하고, 大夫(대부)가 죽는 것은 卒(졸), 士( 사)가 죽는 것을 不 祿(불록), 일반백성이 죽는 것을 死(사)라 했다. 

3. 總記(총기)란 자기의 직책을 總攝(총섭)하다. 자기의 직무를 모 두 아울러 수행하다. 그럼으로써 상을 당한 임금이 말할 필요가 없도록 한 것이다. 

4. 聽(청)이란 따르다, 복종하다의 뜻이다. 

5. 冢宰(총재)란 후세의 재상과 같은 말이다.

 

宓子賤의 無爲之治 

宓子賤治單父, 彈鳴琴, 身不下堂而單父治. 巫馬期亦治單 父. 以星出, 以星入, 

복자천치선보. 탄명금, 신불하당이성보치, 무마기역치선보, 이성출, 이성입. 日夜不處, 以身親之, 而單父亦治, 巫馬期問其故於宓子賤, 宓子賤曰 我之謂任人, 子之謂任力. 任力者固勞, 任人者固 佚. 劉向의 <<說苑>>, <政理 篇> 일야불처, 이신친지, 이선보역치, 무마기문기고여복자천, 복자천왈 아지위임인, 자지위임력, 임력자고로, 임인자고 일.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복자천이 선보(單父)라는 지역을 다스리면서, 다만 거문고만 탈 뿐, 직접 당 아래에 내려오지도 않았건만, 그 지역이 잘 다스려졌다. 한 편 무마 기가 그 지역을 다스렸을 때에는, 별이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다시 별이 떨어져야 들어와 밤낮으로 쉬지도 못하고 몸소 나서서 선보를 다스렸을 때에도 또한 다스려지기는 했다. 무마기가 복자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복자천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사람에게 일을 맡겼고, 그대는 힘에 일을 맡겼기 때문이오. 힘에 일을 맡기면 진실로 힘 들지만,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편안하지요!” 

복자천이나 무마기 모두 공자의 문하생이었는데, 그 다스림의 방식은 서로 달랐다. 무마기는 개인의 능력만 믿고 “별보기 운동”을 하듯 온 지역을 돌아다니느라 쉴 틈이 없을 정도였지만, 복자천은 거문고를 타는 여유를 갖고서도 집무실을 나오지도 않았는데, 지역정치를 잘했다고 하 는 건 무슨 까닭일까? 복자천은 모든 업무를 부하에게 위임해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고를 줄인 채, 실무수준의 직무에서 벗어나 지역발전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소위 기업경영에서 말 하는 “Empowerment Management”를 몸소 실천한 위임경영의 달인이었을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기본적인 경영접근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가게주인 스타일’의 무마기와 모든 걸 분야별 전문가에게 맡기고 지도자는 보다 큰 차원의 일, 즉 기업의 미래를 구상하고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는 일에 몰두하는 ‘위임하는 스 타일’인 복자천으로 구분해서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 가를 결정해야 한다. 대기업군의 경영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치 동네 가게를 운영하는 가게주인에서 탈 피하지 못하는 한, 그 기업군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순임금이나 복자천과 같이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고 그들을 신뢰하는 가운데 철저한 위임을 통한 경영 즉, 위임경영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의 경영방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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